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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준] 4월30일 베트남 통일의 날-사이공 정권 왜 붕괴되었나?
작성자 김영신 등록일 2021-04-30 21:18:38 조회수 44

[심상준 칼럼] 1975년 4월 30일, 남부해방의 날-사이공 정권 왜 붕괴되었나?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 당시 북베트남군은 월남의 상징인 대통령궁을 T-54/55 전차로 가장 먼저 장악했다/출처=베트남근현대사연구소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 당시 북베트남군은 월남의 상징인 대통령궁을 T-54/55 전차로 가장 먼저 장악했다/출처=베트남근현대사연구소

1975년 4월 30일, 당시 필자는 우리나라의 어느 해안선에서 보초를 서고 있을 때 라디오에서 남부 사이공이 함락되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날 하늘은 잿빛이었다.

베트남 전쟁을 미국 측이 아닌 베트남 측 입장에서 볼 때 이날은 美제국주의자에 의해 세워진 괴뢰정부인 남베트남(1955-1975)이 북베트남에 의해 해방된 날이다. 그래서 베트남에서는 이 날을 ‘남부해방일(Ngày giải phóng miền Nam)’ 이라 하고 동시에 ‘통일의 날(Ngày thống nhất)’이라 하며 크게 기념한다.

하지만 멀리는 인도, 가까이는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등에서 코로나가 재발하며 수많은 인명피해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그 여파가 베트남에까지 미치는 바람에 그 역사적인 남부해방일의 감동과 감격과 환희를 재현하는 어떤 축제행사도 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가 지금 이 칼럼을 쓰는 시각에도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남쪽 방향으로 66km 떨어진 하남성에서 코로나 감염자가 잇따라 발생했다.

프랑스의 재침략이 실패한 이유

1945년 8월 혁명 후 이어진 9월 2일 호찌민의 독립 선언을 당시 국제사회가 승인했더라면 그 후 30년에 걸친 베트남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국제사회는 그럴 용의가 없었고 특히 식민지 종주국인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 대한 지배의지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 이듬해 1946년 12월에 베트남민주공화국과 프랑스 사이에 군사대결이 전면화되면서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와 프랑스간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이 시작된다.

프랑스가 베트남에 다시 침략을 시도한 것은 베트남의 변화와 저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8월 혁명을 거치면서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었다. 54개의 다민족이 단일 민족이라는 일체감이 생기면서 새로운 정신이 국민들의 의식 속에 공고하게 뿌리를 내린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예측과는 달리 베트남의 저항은 강력했고, 때마침 1949년 이웃나라 중국의 공산화로 베트남은 이웃동맹을 얻게 됨으로써 베트남의 군사력은 급격히 강화되었다. 게다가 그 이듬해인 1950년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국제사회에서 베트남을 지지함으로써 베트남의 위상이 한층 강화되자, 프랑스가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고, 이로써 전쟁이 장기국면으로 접어들어 8년 가까운 전쟁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개입으로 2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확대

프랑스는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음에도 1954년 5월 7일 베트남의 서북부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남에 완패함으로 호찌민정권에 국토의 4분의 3을 넘겨주게 된다. 그렇게 되자 프랑스를 뒤이어 미국이 개입함으로 이번에는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와 미국간의 싸움으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확대된다.

미국 측에서 보면 1965-1973년까지 8년이라는 긴 대외전쟁이며, 규모면에서도 북베트남이 따라올 수 없는 현대식 무기와 5만명이 넘는 인명과 1200억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비용이 투입된 전쟁이다.

사실 미국에게 베트남은 중남미와 달리 직접적인 권익이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유럽과는 달리 미국은 독립전쟁을 거쳐 새롭게 탄생한 나라로써 서구 열강의 식민지 통치에 비판적인 나라였다.

그러하기에 호찌민이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정체성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베트남독립을 위한 도움을 호소하는 글을 몇 번이나 보낸 바 있다. 그렇다면 이런 입장에 서 있던 미국이 왜 베트남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오랫동안 전쟁을 지속했을까, 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개입을 했나?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것은 베트남 자체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 이익 때문이라기보다는 1950년부터 베트남전쟁이 끝나는 1975년까지 미국은 ‘공산주의 봉쇄’라는 세계전략 때문이었다.

나치 독일에 대해 미국이 융화주의적인 태도를 취했을 때 나치의 침략의 야망이 증대되었고 이어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기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인도차이나 지역이 미국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나치를 연상케 하는 소련의 국제공산주의 세력이 이 지역에 들어오는 것을 관망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트루먼을 뒤이은 아이젠하우 대통령도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지 못하면 동남아 전역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도미노 이론을 강조했다. 뒤이은 케네디, 존슨, 닉슨, 포드 정권까지 강조점이 약간씩 달라도 만약 공산주의의 위협 속에서 베트남을 지키지 못한다면 미국의 세계전략에 큰 타격을 받는다는 논리였다.

미국이 막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원조에만 기생(寄生)했던 무능한 남부정권은 베트남 전 인민의 지지를 얻어내는데 필패했다. 그리고 베트남전쟁에 대한 미국의 국내 여론은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미국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1968년 미 대통령의 보좌관인 키신저와 베트남공산당 정치국원인 레둑토와 평화협상을 위한 비밀교섭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양 측의 입장이 너무 달라 오랫동안 교섭은 교착상태에 빠지는데 협상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철수문제였다. 미국 측에서는 남베트남에서 ‘모든 외국군은 철수해야 한다’는 조건에 미국뿐 아니라 북베트남의 인민군도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북 베트남 측에서는 베트남민족은 근본적으로 하나이고 북의 군대는 남베트남에서 외국군이 아니며 민족자결의 원칙에서 볼 때 미국의 침략으로 수립한 사이공 정권은 해체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973년 1월 27일 파리 평화협정은 왜 수포로 돌아갔나

결국 양 측은 서로 한발자국씩 양보함으로 1973년 1월 27일 베트남전쟁의 종결 및 평화회복에 대한 파리평화협정이 성사되었다. 북베트남 측은 사이공정권을 존속시켜주는 조건으로 ‘미군의 철수’를 받아냈다. 당시 남부는 110만명의 사이공 병력과 미국이 제공한 현대적 장비로 북베트남보다 월등한 군사력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설사 미군의 철수 후에 북쪽의 대공세가 있더라도 미국의 공군력만 재투입시킨다면 저지가 가능했다. 

1973년 1월 27일 파리 평화협정 협상 당시 악수하는 레득토 북베트남 특사(왼쪽)와 키신저(오른쪽)
1973년 1월 27일 파리 평화협정 협상 당시 악수하는 레득토 북베트남 특사(왼쪽)와 키신저(오른쪽)

미국의 협상결과에 남부정권은 강한 불만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혹시 북베트남이 대공세를 펼친다고 해도 미군은 재개입할 것이기 때문에 미 의회가 공군의 재개입을 허락하는데 필요한 1~2주만 북의 공세를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원조에만 의존했던 남부 정권, 미군 철수로 붕괴 (1973-1975)

그러나 미군의 철수 후 상황은 미국과 남부정권의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당시 전 세계에 불어닥친 경제 불황은 외부원조에만 의존하고 있던 사이공정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주었다.

뿐만 아니라 파리협정이 조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사회에서 베트남에 대한 여론이 가라앉질 않았고 의회는 정부가 요구한 베트남의 군사원조를 삭감함에 따라 사이공정권은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유효한 결정적인 수단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미국의 원조에만 의존해 왔던 남부정권에게 심리적인 영향을 크게 미쳐 이미 패배를 느끼게 했다. 더구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 닉슨이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되자 뒤이은 포드정권은 사이공정권을 막아낼 수 있는 어떤 수단도 갖고 있지 않았다.

파리평화협정의 결과로 미군이 철수했으나 평화는 오지 않았고 영토 확보에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상호간 교전은 계속되었다. 1974년까지 우위를 차지한 쪽은 사이공정권이었다. 그러나 1974년 여름부터 우려한 대로 사이공정권에 경제적인 심각한 위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경제적인 위기는 사이공 정권의 버팀목이던 군인들에게까지 들이닥쳤다. 군인이 받는 수입만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없게 되자 군인이 주민에게 물건을 빼앗고 북부세력을 상대로 석유나 무기, 식량들을 암거래하는 현상까지 널리 나타났다. 이것을 목격한 북측은 국면전환을 시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사공세를 결정하게 되었고, 또 당시 상황으로 미국의 군사개입의 어려울 것을 판단하고 대공세를 펼치기로 결정했다.

군사력 열세인 북, 슬쩍 찔러 보았는데 예상 외로 무너지는 남

그러나 북이 남보다 군사력이 워낙 열세인지라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우선 몇몇 지역을 공략했는데 예상 밖으로 남부군이 주저 앉으며 중부의 훼, 다낭을 포함해 사이공 군대의 지역이 별 저항 없이 북의 세력권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원래 북 베트남은 1974년부터 1976년까지 2년의 계획을 세워 대공세를 펼치려고 했는데 순탄하게 남베트남을 접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보함으로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의 조기공격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 후 닉슨정부가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시도했을 때 중국의 등소평이 미국에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고,  만약 남과 북의 분쟁이 장기화 된다면 예상치 못한 사태가 전개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사이공정권이 예상을 뛰어넘어 쉽게 붕괴되는 바람에 군사적인 방법 외에는 사태를 종식시킬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었다.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이 사이공정권의 대통령 관저에 돌입함으로써 전쟁은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패배, 북베트남 공산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이 날, 필자에게는 베트남에 가고자 하는 꿈이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그 후 18년이 지난 1992년 12월 한국-베트남간의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짐으로 비로소 이 땅을 밟게 되었다.

지금은 코로나 사태로 많은 한국인이 베트남을 떠났지만 그래도 여전히 15만 명에 가까운 우리 교민이 베트남 전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중에 필자도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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